소심과 소심이 만나면..

얼마전부터 매일 마주치는 얼굴이 하나 있습니다.
새벽에 운동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버스정류장에서 꼭 같은 시간마다 만나고 있는데요.
제가 그분께 주목했던 이유가 예전에 엄청 친했던 언니와 많이 닮아보였기 때문이지요.
물론 마스크를 써서 얼굴 대부분을 가렸지만
몸집이나 눈매나 피부색 등등이 비슷해보여서 유심히 살피곤 했답니다.
마지막으로 연락했을 때 그분이 사시던 지역도
문제의 버스정류장과 상당히 근거리였다는 기억도 떠올랐지요.
많은 부분 매치는 되더라도 역시 마스크의 위력은 대단한지라 100%확신을 못하겠더라구요.
연락을 안한지 15년 가까이 흘러 설령 맞다고 하더라도 아는척 하기는 좀 어색하고
맞는지 아닌지 물어보기는 더더욱 귀찮고,
매일 유심히 보기만 하면서 때론 같은 버스를 타기도 하고
빨리 오는 다른 버스를 타고 그 언니가 먼저 출발하기도 하고..
아무 의미없이 스쳐지나가며 한달여가 지나갔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바로 며칠 전 일이었습니다.
전 여느때처럼 운동을 마치고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지요.
버스를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그날따라 핸드폰을 뒤적이고 싶더라구요.
요즘 노안ㅋ이 갑자기 심해지는 듯 해서 폰은 되도록 보지 않으려고 하는데
버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졌나봐요.
그런데 핸드폰 보기 시작한지 몇초쯤 흘렀을까요
갑자기 제 시야 안으로 그 언니의 얼굴이 쓰윽 들어오는 겁니다.
머리를 한쪽으로 잔뜩 기울이고 제가 맞는지 아닌지 제 눈을 확인하기 위해서
최대한 가까이 본인의 얼굴을 들이댄건데요.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ㅎㅎㅎ
한번 상상해보세요~
제가 버스 정류장 의자에 잔뜩 허리를 구부린채 앉아있었고 게다가 핸드폰을 뒤적이고 있었으니
시선의 방향이 거의 땅을 향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시야 안으로 얼굴이 확 들어왔다는 건
그 언니가 얼마나 몸을 깊숙이 기울였다는 것을 의미할까요ㅋ
그리고 그 정도로 들이댔다는 건 제가 아는 사람이라는 심증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었지요.
저 역시 "그 언니가 맞구나!" 확신이 뇌리를 때렸습니다.
그런데 더 웃긴게 쑥 들어온 언니의 얼굴, 그리고 밀려드는 확신과 동시에
제가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세요?
"지금 내 눈빛이 흔들리면 다 들킨다!"
원래 사람이 미리 철저한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속내가 드러나게 되잖아요.
만약 순간 제가 당황해서 웃거나 친숙함 혹은 반가움을 눈빛에 조금이라도 담게 된다면
지금까지 제가 한달동안 모른척했던 응큼함이 드러나게 될 것 같은 것 있죠ㅋㅋㅋ
그래서 언니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핸드폰만 바라보면서
눈빛을 텅 비운채 무심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갸우뚱하던 그 언니는 버스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 사건 후부터 전 다른 버스정류장을 이용하고 있습니다ㅋ
저도 한때는 사람 욕심이 참 많은 때가 있었습니다.
두세번 얼굴을 본 사람이면 꼭 핸드폰 번호를 저장해놓고
때되면 안부 문자를 보내면서 인연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언니의 사진도 제 싸이월드에 엄청 많이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다 부질없게 느껴지더라구요.
지나간 인연은 정리가 되고 새 인연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임을 인생을 살면서 배우게 됐답니다.
오히려 붙잡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나이가 들면서 관심사도 변하고 연륜의 깊이도 달라지기 때문에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인연이 바뀌어 나타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었고
억지로 계속 연결되고 싶어하는 마음은 집착이거나
혹은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아 양쪽 모두에게 에너지 낭비이거나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고자 하는 억지 자존감 충족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저는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워렌 버핏이 10년 후까지 같이 갈 주식 종목이 아니면 단 10분도 보유하지 않고
10년 후까지 같이 할 인연이 아니라면 단 10초도 만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좀 극단적으로 표현됐긴 하지만 말의 이면에 담긴 주식에 대한 철학과 인연에 대한 해석 등등이
깊이 성찰해볼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나간 인연에 대한 해석은 그렇다 하더라도!!!
제가 좀 심하긴 심했나요?ㅎㅎㅎ
버스정류장에서 소심과 소심이 만나니 발생한 어이없는 사건이었네요.
그냥 "누구누구씨 아니세요?" 한마디면 단백하게 끝날 일을
한달여를 질질 끌면서 마무리도 명쾌하지 않게 도망치고 말았으니
괜히 죄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저의 작은 그릇을 새삼 실감하게 되네요. 이래서 큰인물이 못됐나?ㅋ
모르긴 몰라도 그 언니가 마스크 위의 저의 눈을 확인하고자
시도한 바로 다음날부터 갑자기 제가 사라졌으니
80%쯤 되는 심증이 100% 확신과 서운함으로 연결되지 않았을까...
계속 마음에 걸려있느니 내일은 일부러라도 좀 치장을 하고 정류장에 가봐야겠습니다.
(솔직히 운동 직후라 꼴이 영 엉망이긴 했습니다ㅎ)
오랫동안 긴가 민가 했었다구 솔직하게 말한 후에
같이 커피라도 한잔 마시면서 옛날 얘기 하다보면
치열하고 힘들었던 20대때의 소중한 인연들에 대해
예의를 다하는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게 맞겠죠? 여러분?^^
참! 그리고 이 사진은 자주 가는 커피숍 아가씨가 서비스로 선물해 준 빵인데요.
오븐에서 막 구워서 싸주더라구요ㅠ 어찌나 고맙던지...
엄청 촉촉하구 따뜻해서 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두 홀딱 반했네요.
커피숍 아가씨의 이쁜 마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네요~^^
비록 눈으로나마 막 구은 맛있는 빵 드시면서 오늘도 모두들 화이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