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버스에서 내리면서 정면으로 폐지줍는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제가 아는 분이었는데요.
마스크 위로 아주머니의 급당황하신 눈빛이 보였고
휙 몸을 돌리곤 총총 걸음으로 방향을 바꾸셨지요.
아주머니와 무슨 일이 있었냐구요?ㅎㅎㅎ
아주머니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꽤 오래부터인것 같아요.
5년이 훨씬 넘었으니까요.
고생에 쩔은 듯 깡마르고 시커먼 얼굴의 아주머니가
매일같이 하루도 쉬지 않고 폐지를 줍는 모습을 보게 되었지요.
왠지 도와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 후부터 택배박스가 도착하면 무조건 모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박스는 보통 바로바로 내놓잖아요?
가족들이 왜 부피도 큰 박스를 쌓아두냐며 불만스러워했지만
아주머니를 만날때까지 좁은 현관에 꽉차도록 내놓지 않았답니다.
박스 뿐 아니라 못쓰는 가전제품도 아주머니께만 드렸고
아직 쓸만한 제품들은 아주머니께서 쓰시겠다면서
좋아라고 가져 가시곤 했습니다.
특히 한여름 숨이 헉헉 막히는 날엔
멀리서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가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이 보일때마다 가슴이 아팠지요.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파스나 음료수도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 저희 빌라에 별스런 일이 일어났어요.
막 추워지기 시작한 즈음이었는데
빌라주민분들이 유기견 보호소에 보내기 위해서 못쓰는 이불을 모았습니다.
그걸 누구 손이 탈까봐 현관 자동문 안쪽 1층 계단 밑에 잠시 보관했었는데
놀랍게도 일요일 아침 두세시간 새에 감쪽같이 모두 사라진 거에요.
이상해서 CCTV를 뒤져봤더니 뜻밖에도 그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폐지가 담긴 유모차를 밀며 지나가다 잠시 자동문 안을 살피더니
비번을 누르고 들어오셔서 모두 들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참 황당하면서도 화가 나더라구요.
제 물건도 아니고 여러 주민분들이 마음을 모은 거라
감정적 동요가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바깥 쓰레기장에 놓아둔 물품도 아니고
왜 현관문 안쪽에 있는 물건까지 가져가셨나 싶어서 내내 이해가 안되더라구요.
여러 주민분들께서 신고해버리자고 말씀하시기도 했지만
그 아주머니의 말씀은 들어봐야 할것 같았습니다.
실수라면 되돌려주실수도 있으니까요.
다음날 길에서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혹시 가져가셨냐구 여쭤봤지요.
끝까지 모른다고 하시네요ㅠ
CCTV에 얼굴이 찍혔냐만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마침 가지고 있었던 어두컴컴한 자동문 안쪽의 사진을 보여드리니
자신은 모르는 사람이라며 너무 어두워 이것만 가지고는 사람 못찾는다구 하셨어요.
CCTV속 회색 유모차나 머리에 쓴 털모자나 잔뜩 굽은 허리나
누가 봐도 아주머니가 맞는데 본인만 아니랍니다ㅠ
외부의 다른 CCTV를 더 뒤져서 앞모습이 확실히 나온 증거 화면도 찾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더라구요.
아주머니에 대한 인간적인 배신감이 몰려왔습니다.
혹시 이불이 몰래 와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건만은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어요.
아주머니는 얼굴이 찍히지 않은 것에 안도감을 느꼈고
모르쇠 전략으로 밀고 나가기로 하신 것 같았습니다
주변 분들은 보호소로 가나 아주머니한테 가나
힘겨운 누군가에게 간 건 똑같으니 그냥 잊어버리라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제 복잡한 심경 속에서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마무리되지 않았어요.
이불을 떠나서 오랫동안의 선의가 통째로 무시당한 듯 했고
그 후부터는 아주머니에게 살가운 말이 나오지 않더라구요ㅠ
어떻게 됐냐고 꼬치꼬치 물으시길래 냉랭한 말투로 이 말은 했지요.
"얼굴 다 봤어요. 누군지 다 아는데 말 섞고 싶지 않아서 안하는 거에요"
"그래요?"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묻어났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데면데면한 겨울이 지나갔습니다.
멀리서 보면 피하기도 했고 길을 돌아가기도 했지요.
아주머니를 향한 서운함이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어요.
주민분들과 상의해서 빌라 현관 비번도 바로 변경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최근 새벽에 나갔을 때 아주머니를 오랜만에 보게 됐습니다.
동이 트기 전부터 리어커를 밀고 동네를 도는 정말 열심히 사시는 분!
안쓰러움과 함께 갑자기 제 스스로가 참 창피하게 생각됐습니다.
저렇게 치열할 정도로 부지런히 사시는 분을 내가 뭐라고 함부로 재단하고 판단하고 벌을 주나
어차피 버릴 쓰레기 모아서 준걸 굳이 도와줬다며 생색을 내고 있는 제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어요.
누가 버리는 건줄 알고 들고 가셨을 거구
갑자기 물어보니 당황하셔서 사실을 얘기할 수 없었을 거구
저에 대해 애정과 고마움이 있는 만큼 더 털어놓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조금만 머리를 써도 얼마든지 이해가 가능한 상황이었지요.
선의가 선의 그 자체로 아름답기 위해서는 주면서도 잊어버려야 한다고 하지요.
제가 선한 사람이라는 자기만족을 위해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데 굳이 쥐어주면서 자아도취됐다가
조금이라도 되돌려 받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스스로 상처를 만든 것이지요.
옹졸하고 치사함을 많이많이 반성하면서
이제부터는 아주머니를 만나면 예전처럼 활짝 웃으면서 말을 걸어보려고 합니다.
누군가에겐 정말 소중한 가족이실 아주머니께
우리 엄마 혹은 제 자신을 대하듯
귀하게 귀하게 좋은 인연을 만들어가야겠습니다.
오늘부터는 다시 열심히 박스를 모아야겠어요.
가격이 많이 떨어져서 이젠 돈이 안된다며 폐지 줍는 일을 관두신 분들이 많던데
변함없이 매일 같은 모습으로 수십번 동네를 돌고 계시는 아주머니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래봅니다^^